아트페어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했다. 가격표를 보니 '에디션 30'. 작품 하단 왼쪽에는 연필로 7/30이라 적혀 있고, 옆에 있는 비슷한 작품에는 A.P.라고만 써 있다. 갤러리 직원에게 물어볼까 싶지만 괜히 기본적인 걸 모르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된다.

사실 이 숫자와 약어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한 번만 알아두면 어떤 전시장에서든 당황하지 않아요.

기본: 분수 형태의 에디션 넘버

작품 하단 왼쪽에 적힌 7/30 같은 숫자가 가장 기본적인 에디션 넘버입니다. 분모(30)는 이 작품이 총 30점 한정으로 제작되었다는 뜻이고, 분자(7)는 그중 7번째로 찍힌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작가는 정해진 부수를 모두 찍고 나면 판을 폐기하거나 줄을 그어(cancel) 더 이상 인쇄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후에는 작가 본인도 추가 인쇄가 불가능하죠. 이 약속이 에디션의 핵심이고, 작품의 희소성을 보증하는 장치입니다.

에디션 넘버는 작품 하단 왼쪽에, 서명은 하단 오른쪽에 적는 것이 국제적 관행입니다. 모두 연필(보통 4B)로 씁니다.

넘버링 외의 표기들

에디션 넘버 외에도 다양한 약어를 만날 수 있는데요, 가장 흔한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주 만나는 에디션 약어
A.P. (Artist's Proof)
작가 보관용. 에디션 부수에 포함되지 않으며, 보통 전체 에디션의 10% 이내로 제한됩니다. 불어로는 E.A.(Épreuve d'Artiste)라 씁니다.
H.C. (Hors Commerce)
'비매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갤러리 전시용이나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수량이 극히 적어 오히려 컬렉터들 사이에서 가치가 높게 평가되기도 합니다.
B.A.T. (Bon À Tirer)
'인쇄해도 좋다'는 뜻. 작가가 최종 승인한 기준 인쇄물로, 한 에디션에 단 한 점만 존재합니다. 나머지 모든 인쇄물은 이 B.A.T.와 동일한 품질이어야 합니다.
T.P. (Trial Proof)
시험 인쇄물. 색상이나 구도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찍은 것으로, 최종본과 다를 수 있습니다. 상태가 좋은 것만 T.P. 표기를 달아 보관합니다.
P.P. (Printer's Proof)
인쇄 공방(프린터)에게 주는 보관용. 판화를 작가 혼자 찍지 않고 전문 공방에 의뢰한 경우에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단순합니다. 숫자가 있으면 정식 에디션, 약어가 있으면 특수 인쇄물입니다.

에디션 넘버와 가치

'1번이 제일 비싼 거 아닌가요?' 이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과거에는 맞는 이야기였습니다. 전통 판화에서는 판이 점점 마모되기 때문에 앞 번호일수록 인쇄 상태가 선명했거든요.

하지만 현대 판화에서는 기술이 좋아져서 1번과 30번의 품질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번호 자체보다는 에디션 부수(총 몇 점인가)가 가격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칩니다.

에디션 부수와 시장 가치
소량 에디션 (10~30부)
희소성이 높아 가격도 높은 편. 작가가 직접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량 에디션 (30~100부)
접근성과 희소성의 균형. 중견 작가의 에디션에서 흔히 보는 부수입니다.
대량 에디션 (100부 이상)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아 입문하기 좋지만, 시간이 지나도 가격 상승 폭은 작은 편입니다.

A.P.는 에디션보다 가격이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부수에 포함되지 않는 데다 작가가 직접 보관하던 것이라는 상징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실전: 전시장에서 확인할 것

판화나 사진 에디션 작품을 구매할 때, 다음 세 가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에디션 작품 구매 체크리스트
에디션 넘버와 작가 서명이 작품에 직접 표기되어 있는가?
총 에디션 부수가 몇인지 확인했는가? (적을수록 희소)
보증서(Certificate of Authenticity)가 발급되는가?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다면, 작품의 진위와 희소성에 대해 기본적인 안심을 할 수 있습니다.

숫자 너머의 의미

에디션 시스템은 결국 약속입니다. 작가가 '이만큼만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각 인쇄물의 가치가 보장되는 것이죠. 연필로 적힌 작은 숫자 하나가 작가와 컬렉터 사이의 신뢰를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다음에 전시장에서 작품 하단의 숫자를 발견하면, 이제 그 의미를 알고 있으니 한결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혹시 A.P.라 적힌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면 — 그건 작가가 자기 곁에 두고 싶었던 바로 그 작품이라는 뜻이니,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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