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에칭을 보다가, 혹은 아트페어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의 가격표를 보다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판화는 결국 찍어낸 거잖아. 그게 진짜 예술 작품이야?" 합리적인 의문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알고 나면, 판화를 보는 눈이 꽤 달라진다.
판화는 '복사'가 아니라 '창작'이다
프린터로 그림 파일을 출력하는 것과 판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판화에서 작가는 판 자체를 직접 만든다. 나무를 깎고, 금속을 부식시키고, 돌 위에 그림을 그리고, 실크 스크린을 뚫는다. 이 판을 만드는 과정이 곧 창작이며, 그 판에서 찍혀 나온 모든 작품은 원본(original)으로 인정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원본으로 받아들이는 브론즈 조각도 거푸집(mold)에서 여러 점을 떠낸 것이다. 판화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작가의 손이 개입된 '판'이라는 매트릭스에서 나왔느냐의 여부이지, 한 점이냐 여러 점이냐가 아니다.
네 가지 세계: 판화의 기법들
판화는 잉크가 종이에 옮겨지는 원리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각각의 기법은 전혀 다른 질감과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것만 알아도 판화를 감상하는 재미가 배가 된다.
- 볼록판 — 목판화
- 남겨둔 부분에 잉크를 묻혀 찍는다. 동양의 불경 인쇄부터 독일 표현주의까지, 가장 오래된 기법. 강렬하고 거친 선이 특징이다.
- 오목판 — 에칭, 동판화
- 파낸 홈에 잉크를 채워 찍는다. 동판에 산(acid)으로 선을 부식시키는 에칭은 렘브란트가 즐겨 쓴 기법으로, 섬세하고 풍부한 명암 표현이 가능하다.
- 평판 — 석판화(리토그래프)
- 평평한 돌 위에 유성 크레용으로 그린 뒤 물과 기름의 반발을 이용해 찍는다. 회화에 가장 가까운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서 로트레크, 미로, 샤갈 같은 거장들이 사랑한 기법이다.
- 공판 — 실크스크린
- 천의 구멍을 통해 잉크를 밀어내 찍는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시리즈가 바로 이 기법. 선명한 색면과 대량 생산의 미학을 동시에 보여준다.
같은 '판화'라는 이름 아래에 이렇게 다양한 세계가 있다. 미술관에서 판화 작품을 만나면 캡션에 적힌 기법을 한 번 눈여겨보자. 목판화의 거친 힘과 에칭의 정교한 선, 석판화의 부드러운 색감, 실크스크린의 팝한 선명함은 각각 전혀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작품 아래 숫자의 비밀: 에디션
판화 작품 하단을 보면 연필로 적힌 숫자가 보인다. 23/50 같은 형태다. 이것이 바로 에디션 번호로, 총 50점을 찍었고 이 작품은 그중 23번째라는 뜻이다. 작가가 직접 번호를 매기고 서명을 넣는 이 행위는, 각 인쇄물이 작가가 품질을 확인한 오리지널 작품임을 보증하는 일종의 인증 절차다.
가끔 번호 대신 A.P.라고 적힌 작품을 볼 수도 있다. Artist's Proof, 즉 작가 보관용이다. 에디션 부수에 포함되지 않으며 보통 전체 부수의 10% 이내로 제한된다. 이 밖에도 E.A.(Épreuve d'Artiste, A.P.의 프랑스어), H.C.(Hors Commerce, 비매품) 같은 표기를 만날 수 있는데, 모두 정식 에디션 외의 특수 인쇄물이라는 뜻이다.
에디션과 가격의 관계
에디션 부수가 적을수록 작품의 시장 가치는 높아진다. 같은 작가의 비슷한 수준의 작품이라 해도, 5부 한정과 100부 한정은 가격 차이가 상당하다. 또한 초기 번호(1/50, 2/50 등)가 후기 번호보다 인쇄 상태가 선명할 수 있어 약간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한다. 다만 현대 판화에서는 기술 발전 덕분에 첫 장과 마지막 장의 품질 차이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
작품 컬렉팅에 관심이 있지만 유화 원작의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판화는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동일한 작가의 작품을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소장할 수 있고, 에디션이라는 체계 덕분에 작품의 진위와 희소성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찍어낸다는 것의 의미
판화의 역사는 곧 지식과 이미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려 한 인류의 노력과 맞닿아 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가 책의 혁명을 이끌었듯, 뒤러는 목판화로 자신의 예술을 유럽 전역에 퍼뜨렸다. '찍어낸다'는 행위는 복제가 아니라, 예술을 더 많은 사람의 곁에 놓으려는 의지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아트페어에서 만나는 현대 작가들의 판화 에디션은, 미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입구가 되어주고, 오래 감상해 온 사람에게는 또 다른 깊이를 선사한다.